[와인기행]굴 화석이 빚어낸 정통 화이트 샤블리 <2013 11/12ㅣ주간경향 105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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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13 오전 9:5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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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블리 와인은 한때 정통 화이트 와인의 대명사로 불렸고, 신세계 화이트 와인의 기준이 되기도 했다.
밭에서 수작업으로 수확한 포도는 포도밭에서 직접 선별 작업을 한 후 와이너리로 운반한다.
포도 수확이 한창인 지난 10월 1일부터 15일 동안 필자는 보르도와 함께 프랑스 와인의 양대 산맥이라고 할 수 있는 버건디, 와인의 변방 사부아, 쥐라를 거쳐 샴페인 지방의 와이너리를 찾았다.
올해 포도농사는 이상 기후로 인해 오뉴월에야 개화를 시작한 탓에 수확도 평년에 비해 한 달 정도 늦어졌다. 기대했던 단풍이 물든 찬란한 가을의 포도원 풍경은 볼 수 없었지만, 포도 수확 과정과 초기의 양조 과정을 자세히 볼 수 있었던 것은 필자에게 행운이었다.
첫 여정은 파리에서 가까운 화이트 와인의 성지 샤블리 마을에서 시작하였다. 파리에서 남동쪽으로 약 200km 떨어져 있는 이곳은 버건디 와인 생산지역에 속하지만 지리적으로는 오히려 샴페인 지방에 가깝다.
샤블리의 와인 역사는 프랑스 다른 지방처럼 기원전 로마군에 의해 전파되었다. 12세기부터 이곳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시토 수도원에 의해 본격적으로 샤르도네가 재배되었으나, 중세 암흑기를 지나 와인 업계에 샤르도네 와인 붐이 일어난 20세기 중반까지도 이곳 와인 산업은 침체해 있었다.
포도밭은 석회암, 점토와 특이하게 작은 굴 화석으로 이루어져 있는 키메리지엔 클레이(Kimmeridgian Clay·키메리지엔은 쥐라기와 백악기의 지층을 완벽하게 보여주는 영국의 도싯 해안가 암벽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음) 토양이며, 겨울이 길고 추운 대륙성 기후다. 냉해를 방지하기 위해 포도원에서는 직접 난로를 피우거나, 물을 나뭇가지에 뿌려 얼음을 만들어 마치 에스키모의 이글루처럼 포도나무를 보호한다.
샤블리의 프르미에 크뤼급 포도원 바이용. 일일이 손으로 수확하는 모습이 보인다.
100% 샤르도네 포도로 만든 샤블리 와인은 과일향이 풍부하지 않다. 오히려 이곳 테루아를 반영하여 견고하면서도 수정같이 맑고, 우아하면서 군더더기 없는 그 풍미의 순수성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와인애호가들이 샤블리 와인과 가장 잘 어울리는 음식이 굴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산도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어쩌면 샤블리의 테루아가 굴 화석으로 이루어진 데에서 기인하지 않았을까 싶다.
미국·호주에서도 이 지역 이름 차용 샤블리 와인은 한때 정통 화이트 와인의 대명사로 불렸고, 신세계 화이트 와인의 기준이 되기도 했다. 이 때문인지 미국이나 호주에서는 지금도 이 지역의 이름을 그대로 차용하여 샤블리 와인이라는 이름으로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일부 와인 초보자들은 샤블리를 포도품종으로 오해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과거의 명성과는 달리 현재 샤블리 와인은 일부 신세계의 샤블리 와인이나 심지어 같은 버건디의 몽라쉐, 코르통 샤를마뉴, 뫼르소 와인에 비해 저평가돼 있는 게 현실이다. 지나치게 견고하고, 과일향이 부족하며, 산도가 강하고, 드라이한 와인 스타일 때문이다. 샤블리 와인을 보호하기 위해 프랑스 정부는 1938년부터 원산지 품질표시제도(AOC)를 도입하였는데 최하위 등급인 프티 샤블리부터 샤블리, 프르미에 크뤼와 최고급인 그랑 크뤼까지 4개 등급으로 나뉘어 있다.
샤블리 마을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였는데 한적하고 고즈넉한 거리의 평화로움이 묘하게 가슴을 설레게 하였다. 우윳빛 석회암으로 이뤄진 중세 건물과 석조로 포장된 거리가 마치 샤블리 와인처럼 우아하게 느껴졌다.
샤블리를 대표하는 와이너리 라로슈가 직접 운영하는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룸 아래로 세렝강의 지류가 흐르면서 들려오는 물소리와 창밖에 전개된 아름다운 풍경에 시간이 멈춘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다음날 새벽에 호텔을 나와 샤블리의 포도원 풍경을 촬영하기 위해 그랑 크뤼 포도원이 모여 있는 세렝강 건너편 언덕배기로 갔다. 광활하게 펼쳐진 포도밭 너머 자욱한 새벽안개를 헤치고 화려하게 피어오른 아침노을의 장관은 필자의 카메라로 도저히 잡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오전 일찍 프랑스 대혁명기에 설립된 샤블리의 대표 와이너리의 하나인 도멘 롱-데파퀴트를 방문하였다. 오랜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회백색 건물이 단아하면서도 아름다웠다. 이곳 총책임자 마티유 만개놋의 안내로 와인셀라를 구경한 후 프티 샤블리를 제외한 4종류의 와인을 시음하였다.
7개 그랑 크뤼 중 하나인 ‘블랑쇼(Blanchots) 2009’는 빈티지가 아직 어리지만 풍부한 아로마와 함께 견고하면서도 우아한 풍미가 샤블리 그랑 크뤼 와인의 전형이었다.
포도 수확 장면을 보기 위해 만개놋과 함께 마을 남서쪽 근처에 있는 프르미에 크뤼 포도밭인 바이용 포도밭을 방문하였다. 새벽부터 조별로 손 수확을 하면 대기하고 있는 운반용 탱크차량에서 포도를 선별하여 와이너리로 보낸다.
포도 자체의 압력으로 흘러나온 주스와 포도를 압착시켜 나온 주스를 함께 발효통(스테인리스 혹은 오래된 대형 오크통)에 옮겨 발효시키는 과정이다. 만개놋이 발효 전 그랑 크뤼와 프르미에 크뤼 포도 주스 두 잔을 가져와 맛보도록 하였는데, 맑고 좀 더 깨끗한 맛의 주스가 그랑 크뤼였다.
13세기부터 와인을 만들었던 지하 저장고에서 시음한 와인과 안내를 맡았던 책임자 마들린.
오후에는 샤블리의 또 다른 신화를 창조한 대표적인 와이너리인 도멘 라로슈를 방문하였다. 1850년에 설립된 라로슈의 본사는 13세기에 건설된 수도원으로 고색창연한 석재건물이 붉게 물든 담쟁이넝쿨과 어우러져 또 다른 감동을 선사하였다. 지하셀라는 13세기부터 수도원에서 와인을 제조해 온 역사적인 장소다.
특히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거대한 목재 포도압착기는 지금도 매년 포도수확 축제 때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이곳 책임자 에티엔 마들린은 “내일 저녁 100명의 VIP를 초청하여 700년 된 이 기계를 사용하여 직접 포도를 압착하는 수확 축제가 열리며 원한다면 초청하겠다”고 했다. 다음 일정 때문에 이 페스티벌에 참석하지 못한 아쉬움이 지금도 남아 있다.
필자는 대신 13세기부터 와인을 만들었던 옛 수도원의 역사적인 지하셀라에서 라로슈의 다양한 와인을 시음하는 감동을 맛보았다. ‘성마틴 샤블리 2011.12’와 ‘프르미에 크뤼 2009’, 최고 등급인 ‘그랑 크뤼 레 클로’와 ‘블랑쇼 2009’년산을 시음한 후 마지막으로 라로슈가 한정 생산하는 1997년산 ‘리제르브 드 로베디엉스’를 시음했다.
특히 ‘리제르브 드 로베디엉스’는 라로슈가 160년 동안 지속적으로 추구해 온 샤블리 와인의 전형을 느낄 수 있는 압축된 와인이었다.
녹색을 띤 연한 노랑색에 수정같이 맑은 투명도, 청사과 같은 신선함, 견고하면서도 감칠맛 나는 풍미의 복합성! 좋은 와인은 언제나 그가 태어난 테루아의 향기와 맛을 표현하게 마련이다. 샤블리 와인이야말로 그의 고향이 어디라는 것을 가장 명료하게 보여주는 모범생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