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을 포함하여 스페인의 모든 문화와 예술의 종착지는 수도 마드리드다. 기원전에 세워진 카탈루냐의 수도 바르셀로나와 아라곤 제국의 수도 사라고사에 비해 마드리드는 1561년이 되어서야 수도로 건설됐으니 비교적 신흥도시라고 할 만하다.
중정에서 바라본 아랑후에스 왕궁.스페인 왕실에서 봄별장으로 사용하였다.
마드리드는 1492년 스페인 통일 이후 이베리아반도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는 지정학적 중요성이 커졌다. 또 오랜 이슬람 지배를 물리친 국토회복 운동(레콘키스타)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오랜 아랍 지배의 영향으로 각기 다른 이질적인 문화가 있었지만, 그것들을 융합해 자신만의 독특한 건축과 음식을 만들어내면서 마드리드는 스페인 문화의 메카로 자리잡는다.
세계 3대 미술관 중 하나로 고야의 대표작이 있는 프라도 미술관, 18세기 부르봉왕가의 번영을 보여주는 화려한 왕궁과 소장품들, 주말에 열리는 격정적인 투우와 축구 경기를 거쳐 밤에는 정열적인 플라멩코를 감상한 후 마이요와 솔 광장에 있는 메손(선술집)을 순례하면서 이베리코 하몽 안주에 한 잔의 셰리나 와인 향기에 취해보는 것도 마드리드에서 만날 수 있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마드리드는 그 근교에서 스페인의 대표적 화가인 엘 그레코의 그림을 감상할 수 있으며, 동서문명이 결합된 고도 톨레도, 거대한 궁전과 높이 95m의 돔이 있는 성당으로 유명한 엘 에스 코리알, 로마시대의 수로와 <백설공주>에 나오는 유명한 알카사르성이 있는 세고비아, 성녀 테레사가 태어난 성벽도시 아빌라 등 스페인의 어느 도시보다도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풍부한 관광의 보고다.
필자는 마드리드를 방문할 때마다 항상 시간 부족으로 놓쳤던 보틴 레스토랑의 저녁과 아랑후에스 고궁을 이번 여행에서 경험했다. 아랑후에스는 마드리드 남쪽 50km에 위치한 스페인 부르봉왕가의 봄별궁으로, 우리에겐 호아킨 로드리고가 작곡한 기타협주곡 ‘아랑후에스 콘체르트’의 배경으로 유명하다.
장님이었던 작곡가 로드리고는 이곳에 신혼여행을 함께 온 아내 빅토리아 카미의 설명에 의존하여 스페인 궁정의 몽환적 분위기와 한때 세계를 지배했던 스페인의 영광과 쇠락의 역사를 가장 서정적인 멜로디로 만들어 불멸의 명작을 탄생시켰다.
1950년대 후반 미국 쿨재즈의 대부 마일스 데이비스도 이곳을 방문하여 영감을 얻었고, 그 곡을 편곡해 ‘스케치 오브 스페인’(Sketch of Spain)이라는 곡을 내놓았다.
역사가 무려 300년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식당 보틴은 헤밍웨이의 단골식당으로 도 유명하다.
볼거리·먹을거리 풍부한 관광의 보고 마드리드 아토차역에서 열차를 타고 황량한 차창 밖 풍경을 지나 아랑후에스역에 도착하니 택시도 탈 수 없는 한적한 마을이다. 걸어서 왕궁까지 갔는데 음악으로 상상했던 것과는 달리 광대한 부지에 자리 잡은 화려하고 거대한 궁전의 위용에 숨이 막혔다. 마을 전체가 왕궁이었고,
지금은 주인이 없는 알람브라궁전의 방을 그대로 모방한 화려한 흡연실과 현란한 색채타일로 장식된 도자기 방을 보면서 아랑후에스 협주곡의 멜로디가 새삼 가슴에 와 닿았다. 우리가 볼 수 있는 세계보다 더 많은 것을 보게 한 장님 작곡가의 아내 빅토리아의 헌신적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스페인을 유난히 사랑했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그의 소설 곳곳에 마드리드의 낭만과 추억을 언급하면서 ‘마드리드야말로 와인의 향기처럼 가장 스페인적인 아로마를 풍기는 도시’라고 극찬하였다. 헤밍웨이가 얼마나 마드리드를 사랑하였는지는 헤밍웨이 루트(The Hemingway Route)가 개발되어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필자는 마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Midnight in Paris)의 주인공처럼 헤밍웨이가 즐겨 찾던 거리를 따라 그의 단골 식당 보틴에서 저녁을 하였다. 보틴 식당은 1725년 왕실의 손님을 맞는 조그만 여인숙으로 출발하여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식당으로 기네스북에 올라 있는 곳이다.
1795년 화가 고야가 접시닦이로 일한 적이 있고, 헤밍웨이뿐만 아니라 세기말의 많은 예술가들의 단골식당으로 유명하다. 필자는 와인애호가 헤밍웨이가 즐겼던 이 식당의 대표 메뉴 중 하나인 코치니요 아사도(Cochinillo Asado)를 주문했다.
코치니요 아사도는 카스티야 지방의 전통음식으로, 태어난 지 2~6주된 젖먹이 새끼돼지를 숯 화덕에 바싹 구운 통구이 요리이다. 요리에만 3시간이 소요되는데 바삭한 껍질과 육질의 맛이 일품이다. 제국주의 시대 스페인의 지배를 받던 나라로 전해져 세계로 전파됐다.
(왼쪽) 스페인의 전통 돼지고기 요리인 코치니요 아사도와 함께 마신 리오하 와인. (오른쪽) 안달루시아 지방의 애환과 사랑을 표현한 플라멩코.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보틴 식당 이 요리는 보르도 스타일의 리오하 레드와인과 궁합이 맞는다. 최근 가장 좋은 빈티지인 2005년산 아마렌 리제르바를 주문하였는데, 소믈리에가 탄닌이 아직 강하니 디캔팅(Decanting)을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동안 오래된 와인은 마시기 전 디캔팅 하는 것이 하나의 상식이자 에티켓으로 통용되어 왔지만 필자는 충분히 숙성되지 않은 젊은 와인을 제외하고는 디캔팅하는 것을 반대하는 입장이다.
디캔팅은 여과주인 와인의 특성상 병 바닥에 침전되어 있는 찌꺼기를 제거하고 순화되지 않은 거친 탄닌을 산화를 통해 부드럽게 하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와인의 맛을 온전히 음미하려면, 순화되지 않은 처음의 와인 맛부터 그 풍미를 다할 때까지의 과정을 비교하면서 마셔야 한다. 필자는 이 음미법을 ‘잠자는 미인’에 비유하고 싶다.
아무리 미인이라도 수십년 동안 잠자다 막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푸석푸석한 피부에 눈곱이 끼여 있을 것이고, 세수한 후의 맨얼굴은 자연 미인이겠지만, 화장한 얼굴은 더 화려하고 매혹적일 것이다. 와인에 비유한다면 그 순간이 디캔팅을 통해 최고조의 맛과 부드러운 향기가 우러나오는 시점이다. 만약 매번 디캔팅하여 마신다면 우리는 항상 미인의 화장한 얼굴만 보는 셈이다.
그러나 한 병의 와인 속에서 피어나는 향기의 변화 과정을 통해 우리가 유년, 청년, 장년, 그리고 노년기의 인생 역정을 반추할 수 있다면, 헤밍웨이가 <오후의 죽음>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와인은 우리에게 감동과 즐거움을 선사하는 가장 감성적인 문명과 자연의 산물로서 신이 우리에게 준 귀한 선물일지도 모른다.